의릉(義陵)은 태조고황제의 조부 도조대왕의 능으로 함흥의 동방 약 10리에 있는 흥남시 운흥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함흥본궁에서 동남으로 건너다 보이는 곳에 소재하고 있다. 1393년(태조 2년) 10월에 봉릉(奉陵) 임좌병향(壬坐丙向) 능참봉을 두고 관리하였다.
의릉은 천주봉(天柱峰)에서 발달한 후롱주봉(厚瀧主峰)에서 서쪽으로 달려든 응봉산(鷹峰山) 줄기가 매봉, 필봉에 이르러 크게 치솟아 마치 창공을 창으로 찌른 모양이 되었다. 이 산봉우리의 모습이 웅장절묘하여 예전엔 운전서원(雲田書院)의 망산(望山)으로써 정기가 용출하였다고 하였다. 이 줄기가 계속 서쪽으로 달리다가 용성봉(龍成峰)에서 다시 살아나서 아래쪽 끝에 치봉(稚峰)으로 다시 일어났는데 그 형세가 마치 꿩이 엎드려 있는 모습이라 하여 복치형국(伏稚形局)이라 한다. 이곳이 의릉 터로써 일찍부터 명당이라 일컬어 왔다. 이 줄기가 의릉에서 약 3Km 서북방에 있는 송학호(松鶴湖)에 이르러 그 세(勢)가 쇠진하였다. 의릉의 경역(境域)에는 아름다운 소나무들로 수해(樹海)를 이루었고 호수에는 군어(群魚)가 서식하고 호반일대에는 창포와 연꽃들이 만발하고 능의 숲에는 진달래, 철쭉꽃이 어울어져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더우기 함흥평야와 이어져 있어 전망이 무변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 호수는 성천강(城川江)의 홍수에 의한 토사의 퇴적과 한일합방 후의 치수(治水)공사로 인하여 황토가 되어버렸다.
성천강을 따라 흥남과 함흥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본궁화학공장은 1935년 40만평의 부지위에 최초로 건설되어 가성소다와 대두화학공장이 들어섰으나 대두화학공업은 이 곳에서 성공을 보지 못하고 계속하여 카바이트, 석회질소 공장이 건설되었으며 태평양전쟁의 확전(擴戰)으로 군수산업을 목적으로 하는 공장들이 속속 건설되어 흥남에 필적할 공장군(용흥공장 포함)이 100만평의 부지위에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의릉에서 서남쪽으로 약 1.5Km 거리에 위치한 카바이트 공장은 처음 1만Kw 전기로 4기(基)였으나 이 후 용흥공장의 항공연료인 이소옥탄의 원료증산 공급을 위하여 2만Kw 3기를 더 증설하여 빽빽이 들어선 굴뚝의 연기가 본궁 하늘을 덮어 실로 장관이었다 한다.
일본의 패전으로 공장이 철거되면서 함흥본궁은 인근 용흥공장으로부터의 피해는 없으나 의릉은 인근 카바이트공장의 공해로 인해 노송(老松) 일부가 고사(枯死)하기도 하였다. 8ㆍ15해방 직후에도 소련군의 감시하에 흥남 일본인 초등학교 교정에 수용된 일본군 포로들의 월동용 화목으로 의릉의 울창한 소나무가 벌목의 수난을 맞기도 하였다. 당시 흥남에는 동양 굴지의 일본 질소비료공장을 모체로 하여 산하에 흥남비료공장, 용성기계제작소, 흥남화약공장, 본궁화학공장, 용흥공장 등 5대 공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를 자세히 소개하는 이유는 조선왕조 창업의 발상지인 함흥본궁 및 의릉과 공장과의 거리가 동쪽 또는 동남쪽으로 각각 직선거리 1.5Km정도로 가까워 그 영향과 피해상황을 알리고자 함이다. 다행히 큰 피해없이 유적지가 보존되어 있슴은 조선개국의 위대한 선조들의 가호로 후손으로서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게 된다. 일본 패망 후 흥남의 5대공장은 한국인에게 접수되었으나 공장의 운영 및 관리와 생산기술이 부족하여 일본인 핵심기술자를 각 분야별로 선발하여 2년간 전수 받은 후, 군수산업에서 평화산업으로 전환하여 60~70여종의 생필품 및 공산품을 생산하게 되었으며 당시 본궁화학공장 및 용흥공장의 종업원수는 약 7,000명에 이르렀다.
6ㆍ25사변당시 잠시 피난갔다 다시 올 수 있다는 생각으로 월남하였으나 그 세월이 어언 58년이나 흘렀다. 20대 초반의 청년이 지금 호호백발의 노인이 되어 오늘도 이산의 아픔을 간직한 채 떠나온 고향산천을 그리며 살아간다. 필자는 일제 태평양전쟁과 6ㆍ25사변의 격동기에 살아남은 행운과 비록 재산은 별로 없으나 훌륭하게 자라며 성공한 자식들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남은 여생을 즐겁고 건강하게 보내리라 조용히 독백하여 본다.
'흥망성쇠(興亡盛衰)'의 땅 흥남이여! 부디 축복 있기를!!'
.....이 글은 종봉(鐘鳳) 종친회장님의 이화(李花) 제208호(2008. 3ㆍ4월호)에 기고하신 수필로써 문맥의 자연스런 흐름을 위하여 제목과 서술부 일부를 수정하였습니다.